'나' 는 지금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사로잡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힘은 제가 더 세니까, 지켜줄게요.'
하지만⋯
지금의 그는 혼자다. 혼자서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 있어주겠다 했던 당신은, 두려워하는 것들로부터 저를 지켜주겠다 했던 당신은, 곁에 없다. 섬광과 함께 잃어버렸다. 영영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를 믿지 않는 신에게 비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는 모든 것이 한없이 두렵기만 했다.
그의 하루는 이러했다. 오늘 처리할 일을 확인한다. 그리 바쁜 날이 아닐 때는 데이비드슨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가벼운 아침식사를 챙기고 나선다. 하기로 정한 일에 따라 빼앗고, 꽃 을 피우며, 지운다. 식사는 내킬 때만, 잠에는 들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일'을 마친 후 짙게 배인 피 냄새를 씻어내려 할 때면, 제 몸에서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를 풍기는 듯한 착각이 일 때도 있다.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하지만 썩어가고 있다는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썩어버린 부분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빠르게 회전하는 시곗바늘을 붙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토해내지 못한 것들은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찔렀고,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곪고 썩어 문드러졌다.
그는 창백한 손으로 퍼석해진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티끌 하나 없는 듯한 새하얀 색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가득 머금어 밝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그저 타고 남은 잔불처럼 끄트머리에 매달린 것이 전부였다.
아니, 어쩌면 이건 말라붙은 핏물일지도.
⋯그는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새삼스레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적어도 새해를 맞이할 시간 정도는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끝을 '늦추는' 것이 고작이다. 편히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자니 겁쟁이인 그는 공포에 질식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희망이 없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고 절망할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많은 것이 두려웠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을 안고 있는 것보다는 덜한 것들이었으나.
되찾은 과거는 이미 자신이 피로 물들어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 속 누군가 저를 부르던 말 그대로, '괴물' 이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존재였다. 지금의 그 또한 그러했다. 괴물을 넘어 사신 이 되었다.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타인을 잡아먹으며 삶을 영위하는 짐승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곳이 제게 걸맞은 자리다.
그럼에도– 우습게도 '인간'으로 살아갔던 시간의 마음을 죽이지 못해 괴로워한다. 외롭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아버린 탓에 그리워하고야 만다.
그렇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헛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저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나.
더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에.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가진 소망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당장 이것이 의미를 가진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란다.
마지막 순간에는 '나' 로서 존재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 내가 '나' 로서 존재하게 해 주는 이들을, 그리고 당신 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야기하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려 주고 싶어. 거짓말이 되겠지만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어. 뒤늦게라도 약속을 지키고, 새로운 약속들을 해 나가고 싶어.
⋯
안다. 알고 있다. 설령 정말 다시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저 마음이 전해질 일은 없다. 전하지 않을 것이다. 전해져서는 안 된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얼어붙은 지금의 내가 그 이유이자 증거다.
당신이 좋아하는 웃음을 보여줄 수 있는 '나' 는 이제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다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그가 가진 유일한 욕심이다. 조금의 미련은 있다지만 살아가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 따윈 없다. 그저 그 온기마저 잊게 되기 전에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을 뿐이다. 분명히 지금보다도 더 망가져 버리겠지만,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사신이 된 괴물은 체념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니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딱 한 번만,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해.
그럼 나는 거짓으로나마 사라질 때 까지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댓글